한국이 당사국 아니라고? 정전협정 66주년, 진실은

국민정책평가신문 | 기사입력 2019/07/26 [10:35]

한국이 당사국 아니라고? 정전협정 66주년, 진실은

국민정책평가신문 | 입력 : 2019/07/26 [10:35]

 [the300][런치리포트]전쟁을 멈춘 시간 '정전협정' 66주년(종합)

①평화협정 하려해도 당사국이 없다? 정전협정의 진실은

오는 27일은 한국전쟁을 '일시멈춤'으로 바꾼 1953년 정전협정 체결일이다. 이날 이후 60년 이상 고착된 '1953 체제'는 큰 변화를 맞았다. 문재인정부 들어 남북, 북미간 적대 관계를 바꿔 이 낡은 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에 힘이 실렸다. 그러자 대한민국이 빠져있는 정전협정문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당사국이 누구냐 하는 논란의 진원이 됐다.

만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꾼다면 실제 당사자는 북한과 유엔군 뿐이란 시각이 있다. 협정문 명칭에 있듯 마크 W.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이 한 쪽에, 다른 쪽에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팽덕회(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사령관)만 있다.

한국군은 미군 주도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웠지만 서명엔 빠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군 철수, 북한의 무장해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등을 내세우며 휴전반대 목소리를 냈다. 미국이 유엔군을 주도하긴 했지만 명목상 직접당사자가 아니다.

중국 또한 자세히 보면 정규군인 인민혁명군이 참전한 게 아니다. 당시 신생국인 중국은 UN군과 전쟁을 벌인다는 양상을 꺼렸다. 인민지원군이라는 묘안을 짰다. 실상은 인민해방군이지만 직제를 바꿔 보냈다. 사령관인 팽덕회의 직함도 '사령원'이다. 결국 군 사령관이자 국가원수로 김일성이 서명한 북한과, 유엔군만 남는다.

2001년 부시 행정부 당시 래리 워첼 해리티지재단 아시아연구센터소장은 "1953년 한국전쟁을 멈춘 정전협정은 유엔 사령관에 의해 서명됐다"며 "평화협정은 그 연장선이 돼야 하고 북한이 유엔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견해에 따른다면 한국은 우리 땅에서 전쟁을 치르고도 정전 및 평화협정 주체가 아니라는 이상한 결론이 된다. 국가원수가 아니라 군 사령관들의 협정일 뿐이란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전시에는 군사령관 서명으로 인정하는 게 국제법상 통용된다.

이에 남북미 또는 중국을 포함한 남북미중을 정전협정이나 미래의 평화협정 당사국으로 보는 게 학계와 국제사회 공감대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의 실질적 당사자다. 유엔군 사령관이 서명할 때 한국 측도 자리를 함께했다. 중국 또한 인민지원군의 서명지위를 계승한 걸로 볼 수 있다. 지난해 4.27 남북 판문점 선언에 종전선언 주체로 '남북미 3자 또는 중국을 포함한 4자'로 여지를 둔 게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종전선언을 통해 정전협정을 정치적으로 대체하고, 이어서 평화협정을 맺는 단계적 접근이 고려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판문점에서 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만나며 사실상 종전선언을 한 걸로 볼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국무회의에서 "남북에 이어 북미간에도 문서상의 서명은 아니지만 사실상의 행동으로 적대관계의 종식과 새로운 평화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선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에 대해 "최소한 사인한 미국, 중국, 북한은 어떤 식으로든 참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이 (먼저) 사인하고 미국 중국이 하느냐, 남북미중이 같이 하느냐 등 형식은 다를 수 있다"고 했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도 "평화협정은 정전협정에 들어갔던 남북미중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66주년 정전협정일이 가까워오며 새로운 도전이 가중됐다. 일본은 경제보복을 가했고 중국·러시아는 독도주변 영공 연합군사훈련에 나섰다. 미국이나 북한뿐 아니라 모든 주변국이 한국을 외교 시험대에 올렸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고, 따라서 '1953 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게 얼마나 절실한 지 새삼 부각된다.

1953년 7월27일 해리슨 유엔대표와 남일 북한대표의 휴전협정조인 모습/사진출처=국가기록원 제공 자료


②정전협정 오전10시 서명하고 12시간 더싸운 이유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한국전쟁 정전(휴전) 협정이 서명됐다. 실제 한반도에 총성이 멈춘 건 12시간 후인 밤 10시. 그 사이에도 남북은 치열한 폭격과 포격을 주고 받았다. 왜 12시간을 기다린 걸까.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그날의 모습이 남아있다.

오전 10시 나무로 만들어진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 양쪽 입구로 휴전협정 서명 대표들이 입장했다. 동측 출입구로 유엔군 측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중장 일행이 서측 입구로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 북한군 대장 일행이 들어와 앉았다.

이들은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협정문서 총 9통에 서명했다. 양측 대표들은 악수도 인사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펜을 들었다. 서명을 마친 양측 수석대표들은 입을 열지 않은 채 퇴장했다. 입장부터 퇴장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2분. 끝난 게 아니었다. 최종 결재권자들의 서명을 받아야 했다.

3시간 후인 오후 1시 유엔기지내 문산극장에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이 한국군 대표 최덕신 소장 등이 임석한 가운데 정전협정 확인서명을 했다. 공산군 측에선 김일성이 이날 오후 10시에 평양에서 서명했다. 총성을 멈추기로 정한 시각이다.

중국 인민지원군 팽덕회 사령원(사령관)은 다음날 오전 9시 30분 개성에서 서명했다. 정전조인 절차의 마지막이다. 3년 1개월, 즉 1129일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이 비로소 멈췄다.

휴전 협상 자체는 개시후 2년, 본회의 159회를 포함한 765번의 긴 회담이 필요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첫 회담이 시작될 때만해도 휴전협정 체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걸로 예상하지 못했다.

첫 고비는 사실상 첫 의제인 군사분계선 결정이었다. 공산군은 전쟁 전의 분계선인 38선을, 전력이 우세했던 유엔군은 그보다 북쪽을 제시했다. 분계선이 결정되면 전투를 중단하기 바랐던 공산군과 ‘전투 계속 원칙’을 고수한 유엔군의 이견도 논점이었다.

군사분계선 협상은 그해 11월 23일 끝났다.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설정이 합의됐다. 유엔군은 이 때만해도 한 달 정도만 더하면 휴전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포로 문제가 복병이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가장 처음 제시한 포로 명단의 격차가 컸다. 유엔군은 약 13만2000명, 공산군은 약 1만1500명의 포로 명단을 제시했고 유엔군이 일대일 교환 원칙을 내세우자 공산군 측은 거부했다. 그러자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만 돌려보내자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번엔 포로 송환 규모가 체제 선전 도구로 비화했다. 송환을 거부할수록 상대 체제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으로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로송환 협상과정에서 공산군 내 이견도 커졌다. 유엔군 제시 송환 거부 포로 중 중국군 출신이 1만4074명이었는데 이중 대다수가 대만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휴전회담을 주도하던 중국은 포로 송환에 비타협적으로 돌아섰다. 유엔군 폭격으로 피해가 막대했던 북한은 수용을 원했지만 중국이 반대했고, 휴전에 부정적이던 스탈린도 중국 편을 들며 협상은 표류했다.

포로 문제에 막혀 교착에 빠졌던 휴전회담은 1952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한국전쟁의 조기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변곡점을 맞는다. 소련의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하자 내부 정비에 집중해야 했던 소련도 휴전에 찬성하게 된다.

1951년 12월 시작한 포로 송환협상만 1년6개월이 걸렸다. 그 기간 수많은 인명이 포화 속에 사라졌다. 전쟁후 남북 사이에는 민족의 동질감 대신 증오와 원한이 남았다.

【서울=뉴시스】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0일 판문점 남측지역에서 문재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동했다고 1일 보도했다. 2019.07.01. (출처=노동신문) photo@newsis.com


③66년째, 세상에 이런 휴전은 없었다…정전·휴전·종전 차이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12월 15일. 독일과 영국 군인들은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정전을 맺는다. 춥고 혹독한 참호 속이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서로 죽고 죽이며 보낼 순 없었다. '정전'은 그런 것이다. 이내 전쟁은 재개됐다.

한반도는 다르다. 25일 정부에 따르면 국제관례상 ‘휴전협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계속되는 경우는 우리가 유일하다. 1953년 이후 66년이다. 남북한은 정전 상태일까 휴전상태일까. 1953년 7월27일의 협정도 정전협정 또는 휴전협정으로 불린다.

25일 정치권과 학계를 종합하면 교전 당사국 사이에 이견이 커 국제기관이 개입할 때 정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휴전은 적대행위를 하지 않을 뿐 국제법상 전쟁상태로 간주한다. 언제든 전쟁을 재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정전과 휴전 어느쪽이 더 평화에 가까운지도 이견이 공존한다.

국민상식 선에서는 전쟁→정전→휴전→종전→평화 순으로 이해된다. 정전은 전투행위만 멈추는 것이고 휴전 협상을 하기 위해 정전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혼용되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1953년 정전협정이 1991년 남북 불가침 등 기본합의에 따라 사실상의 휴전협정이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종전은 글자 그대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강화조약이나 평화조약을 통해 종전이 이뤄진다. '종전선언'은 법적이기보다 정치적이다. 즉 종전선언 없이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 한국과 중국은 한국전쟁 때 총을 겨눈 적국이지만 종전을 선언한 것도 아닌데 이미 관계정상화를 이뤘다. 전문가들은 관계 정상화 방식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하기 나름이라고 본다.

66년 전 한국전쟁 정전협정문은 서언, 전문(본문), 부록 순이다. 서언은 협정의 성격과 적용범위, 전문은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제2조 정화(停火) 및 정전(停戰)의 구체적 조치, 제3조 전쟁 포로에 관한 조치, 제4조 쌍방관계 정부들에 대한 건의, 제5조 부칙으로 이뤄졌다. 부록은 중립국 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를 규정했다.

이후 남북한은 66년간 이 협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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